커풀 티셔츠를 입고 찾아오는 부부. 도쿄에서 나고 시(名護市)로 이주한 지 반년, 「주 5일은 힘드니까 목요일은 쉰다」라고 말하면서 주 4일, 게이트 앞, 아와, 시오카와에서의 항의 행동을 빠뜨린 적이 없다.
나카무라 요시카츠 (中村吉且)(68)와 도시코 (淑子)(68) 부부는 운영하던 대형 운송회사의 택배 청부업을 그만두고 신기지 반대 운동에 뛰어들어왔다. “오키나와로 가면 어떻게든 될 거야”고 낙천적으로 이주를 결정했다고 하면서도, 「기지 강요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쭉 싸우고 있다. 그 운동에 관여하고 싶다. 지금까지의 속죄의 생각」이라고 굳은 결의도 내비친다.
고등학생 시절은 과격파였다고 하는 요시카츠씨. 「70년 일미안보(日米安保)투쟁」에 연루돼 퇴학 직전까지 됐지만 교사 한 분이 교무회의에서 열심히 설득해준 덕분에 퇴학은 면했다. 대학생 시절에도 활동을 우선하여 수업은 듣지 않고, 원하던 교사의 길을 단념했다. 공무원도 되지 못하고 출판업계에 들어갔다.
2013년, 건백서를 가지고 상경한 고 오나가타케시 (故 翁長雄志) 나하시장(那覇市長)등을 맞이하는 집회에 참가. 학생 시절의 그리운 활동가들을 만나 마음이 분기하였는지 부부가 상의해서 오키나와에 가는 것을 결정했다. 「신기지 매립 계획도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오키나와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한번 가봐야 한다고」.
2017년 6월 2일, 게이트 앞의 혼란 속에서 도시코 씨가 떠밀려 쓰러지고 의식불명이 되었다. 두개골 골절, 뇌좌상으로 2주일간 절대 안정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게이트 앞에서 도시코씨의 상태를 마이크로 보고할 때 요시카츠씨는 눈물로 말을 더듬었다. 서로 재혼한 사이의 두분, 택배업에서 함께 일했고 노후생활을 함께 고민하면서 끝에 오키나와 이주를 결정했다.
도시코 씨는 중환자실에서 부활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이주를 결의한 이유를 물어봤다.
본토의 투쟁은 계속 져 왔다. 그러나 오키나와에는 희망이 있다. 이 정도 아내 부상으로 질 수는 없다. 설욕하려고요. “마키퇴 나이비란도” (지면 안된다) 라고 오키나와 말로 말했다.
(캠프 슈워브 게이트 앞)
70명 가까이가 게이트 앞에 연좌농성, 항의의 목소리를 높였다. 모토부 시마구루미 회의의 중심 멤버인 타카가키 기조(高垣喜三)씨(71) 가 어젯밤 급사한 소식을 접하여, 그를 잘 아는 분들에서 애도의 스피치가 잇따랐다.
타카가키씨는 2011년, 오사카에서 모토부쵸로 이주. 이에지마 (伊江島) 에 계속 다니며, 「오키나와의 간디」라고 불리는 아하곤 쇼오코 (阿波根昌鴻)씨의 발자취를 전하는 「와비아이노사토」(반전 평화 자료관) 운영을 도와주었다. 2년 후 상임 이사가 되어, 아하곤 씨가 주창한 비폭력 저항 운동의 정신을 확산시키는 데에 전념했다.
스스로도 실천한 사람이었다. 헤노코 신기지 매립 토사 반출 현장인 모토부쵸에서 반대 운동에 앞서서, 시오카와항에서의 감시 활동에 임해 왔다. 부고를 알게 된 오키나와 평화 운동 센터의 야마시로 히로지씨는 「입장이 다른 토사 반출 업자와도 관계를 쌓아올리고 있었다. 언제나 온화하고 절대 소리를 지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저 외롭고, 괴롭다」라고 울면서 말했다. 의지할 큰 기둥을 잃었다. 4일, 모토부쵸에서 장례식이 열린다.
레미콘 차량 등 181대가 자재를 반입했다.
(류큐 시멘트 아와 부두 앞)
날씨가 안 좋아서 작업 없음
(모도부쵸 시오카와항)
날씨가 안 좋아서 작업 없음
오늘 현재까지의 덤프차 총수 및 토사량 전체에 대한 비율
매립된 토사양의 수치는 덤프 대수로 해아린 것이고 참고치수다.
2018년 12월부터 2019년 12월말까지 반출된 덤프차량의 대수 114,601대(전체 비율1.39%)
753 | 28일(토) | 30일(월) | 12월1일(화) | 2일(수) |
3(목) | 4일(금) |
아와(安和) | 539 | 386 | 997 | 0 | ||
시오카와(塩川) | 0 | 363 | 0 | 0 |
현재까지 덤프 총수 |
토사량
※① |
체적으로 환산
※② |
전체 비율
※③ |
287,737대 | 1,438,685t | 719,343㎥ | 3.561% |